Wednesday, May 31, 2006

느낌이 있는 삶 16.- 매 순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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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 16. - 투쟁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




만약 이러한 병리현상이 RH-787 음독자 중에서 유독이 나 혼자만이 겪은 증상이라면 몰라도, RH-787 음독 자 전원에게 나타난 병리 현상이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RH-787 독성으로 인해 몸이 바짝 말라서 온 몸에 있는 근육의 형태가 없어지는 증상뿐만이 아니고, 몸 자체가 간직하고 있는 몸의 기능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죽어갔던 게 RH-787의 특성이었다.








7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속출한 RH-787 음독 자들이 음독 후에 그들의 몸에 나타난 증상들이 나와 같았다면, 음독 당시에는 죽지 않았던 음독 자들일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정상적으로 살아나기는 힘들었다는 것을 밝혀주고 싶다.

RH-787 음독 자들이 속출한 1970년대 중반과는 거의 30년이라는 공백기가 지난 뒤늦은 시간이지만, 이 글을 통해서나마 ‘RH-787 음독 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보아 온 사람들’에게 ‘RH-787 음독 자들의 어떤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어가야만 했는지’를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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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이후 내가 맞닥뜨린 매 순간마다가 결코 쉽지 않은 삶의 조건이었기에 29년 동안을 ‘투쟁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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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15. - 미친....미친놈! - ‘crazy....crazy guy?’


햇볕을 짧은 시간만 쬐어도 눈이 아프고, 호흡은 가빠지고, 피부에 햇볕이 기운이 강하게 와 닿는 가을철만 되면 몸은 부어오르는 반면에, 습도가 높아도 숨쉬기가 나쁘고, 반대로 습도가 낮아져도 피부 가려움증과 코와 목에 이상이 와서 견디기 어렵고, 또 온도가 내려가면 손·발·무릎·이빨이나 잇몸이 시려서 고생을 해야 한다.

1년 내내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면서도 온도가 조금만 높아도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서 헉헉거리고, 또 조금만 낮아도 손발,b무릎이 시려서 고생하고, 히터나 스팀 등 열전도 효과로 직접 공기를 덥게 한 실내에서는 견뎌내지 못 하는 게 내 몸의 상황이다.

이런 몸 사정을 가지고서 29년을 살아왔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물마시듯 들으면서도 ‘내 특유의 생활발식을 고집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내 몸만이 가지고 있는 수고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은 특별한 사정들 때문이다.


이런 내 몸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나만의 방식대로 열심히 살아 온 덕에 ‘...남들이 하는 것들을 다 흉내 낼 정도...’ 여서 내 몸 상태가 기막힐 정도로 나쁘고 아프다는 것이 가족들이나 가까운 주위사람들한테까지도 엄살로 보일 때가 많다.





Friday, May 26, 2006

느낌이 있는 삶14. - 늙고, 병들고, 가난하고....사망 0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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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14. - 늙고, 병들고, 가난하고....사망 0순위



내가 1-2살 먹은 젖먹이거나 80-90살 연세의 집안의 어른이라면 가족들이 어떻게 하던지 이 조건을 맞춰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17살에 내가 선택한 자살의 결과로 따라온 후유증이었기에 내 가족에게 울분조차 내 놓고 내뱉을 처지도 못 되었다.

이 조건을 갖추고 산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 할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만 지랄발광을 떤다고 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보니 내 핏줄과 내 주위 사람들과 수 없이 부딪쳐 가면서도 ‘나 혼자만이 살아 갈 수 있는 방식’ 과 ‘나만의 공간 확보’를 위해 오늘까지도 발버둥치고 있는 셈이다.




몇 년 전에 ‘헬무트 콜’ 전 서독수상의 부인 ‘한네로레 여사’가 햇볕 알레르기를 비관하여 자살을 한 적이 있다. ‘콜’ 수상 부인의 자살은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특별한 고통 없이 쬘 수 있는 햇볕 에 대한 알레르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살이란 것이 얼마만큼 힘들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 예에 불가하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의 부인 한네로레 여사가 자살한 이유도 햇볕 알레르기를 비관해서다. 한네로레 여사는 극심한 햇볕 알레르기로 대낮엔 일절 외출을 삼가고 운동도 밤에만 바깥에 나와 걸어야만 했다.

자살직전의 몇 개월 동안은 병세가 악화되어 실내조명에도 피부가 자극돼 가능한 어둡게 지내기 위해서 사방에 커튼을 두르고 온종일 암실에 갇혀 지내다시피 지내다가 끝내는 자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햇볕을 거부하면서 살아야 하는 한 가지만도 보통사람들이 인생살이보다는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인생살이를 해야 하는데, 내 경우에는 햇볕뿐만이 아니고 더위, 모든 열과 직접적인 연관되는 것들을 거부하면서 살아야 했었고, 또 이렇게 살아왔다.

2004년 여름이후로는 열과 더위에 신체의 적응능력이 더욱 더 떨어져서 라면 하나 끓여먹기 힘든 상황이다.

여기에다가 2001년 이후에는 빛과도 철저하게 싸우고 있다.

눈이 빛에 대한 거부감을 갖기 시작한 것은 90년 이후부터지만 2001년 이후부터는 시간과 함께 진행되는 당뇨병의 특징과, 이 보다도 더 무서운 2000년 이후에 부딪친 인생살이에 대한 심한 스트레스, 그리고2002년 여름부터 시작한 책 쓰는 작업, 2004년 이후로는 싫든 좋든 간에 매달려야 하는 컴퓨터작업,....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가장 힘들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절규하고, 투쟁하고, 끝도 없고, 답도 없는,...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점은 햇볕, 열, 더위, 습도, 불빛,...

인간의 삶을 유지 지켜주는 이런 요인들에 적응하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유지 지켜주는 기본적인 ‘생존권’과의 끝도 없는 싸움이다.


더 황당한 것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몸이 더욱 나빠지고, 나빠지는 몸에 비례해서 싸움도 더욱 치열해져야만 된다는 사실이다.



*** .....참고로 ‘열과의 싸움’의 한 예를 덧붙이면, 94년도 여름에 폭염이 미국전역을 강타했었다.
그 때 폭염으로 미국전역에서 800명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었다.(831명으로 기억) 죽은 사람 대부분이 늙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유난히 심장병 계통이 많은 것에 주시하기 바란다.

앞부분에서 지루할 정도로 내가 살면서 가장 힘들어하는 요인이 온도 / 햇빛/ 열 / 빛 / 습도....라고 수 없이 밝혔다. 94년 미국의 여름을 예로 든 것은, 똑같이 늙고 / 가난하고 / 심장병 질환으로 고생한다고 하더라도 지내는 거처(집)만 제대로 확보하면 살인적인 폭염이라도 견딜 수 있고, 거처(집) 가 변변치 못하면 견뎌 낼 수 없다는 것을 몇 줄로 이해시키려는데 있다.



또 2002년 프랑스의 폭염을 예로 들어도 이와 비슷하다.

2002년 여름에 살인적인 더위가 2주 동안 프랑스 전역을 엄습해서 프랑스 전역에서 14000여명, 파리시내에서만도 5000여명이 죽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때도 94년 미국의 폭염 때처럼 폭염 때문에 죽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늙고, 병들고, 가난한...그 가운데서도 심장계통의 질환을 앓고 있는 ‘심장병 환자’들이 희생이 유독이 컸었다.

94년 미국에서 폭염으로 사망한 800여명의 사람들과 2002년 여름에 살인적인 더위로 인해서 프랑스 전역에서 죽은 14000여명들의 대부분은 집에 변변한 냉방기기를 갖추지 못하고 살았었던 ‘가난한사람들이었다.’ 는 것이 내가 강조하고 싶은 말이다.





늙고 병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유독이 집에 냉방기기를 못 갖추고 사는 사람들만이 폭염에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분으로 그 소식을 들었는지 난 모른다.

이런 뉴스를 들을 때 마다 온 몸의 신경이 경직되다시피 하는 것은 내 상황도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 만큼 심장이 극도로 약한 사람들은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체온이 올라가도, 또 외부의 온도가 너무 높아져도,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도, 극적인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보통 정상인들도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체온이 올라간다. 또 밥이나 그 밖의 음식물을 먹어도 섭취한 음식물의 열량에 의해서 체온이 올라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건강한 몸일수록 일시적으로 올라 간 체온을 조절할 수 있는 몸의 신진 대사기능의 혜택으로, 아니면 올라간 체온을 이겨 낼 심장 덕분에 일상적으로 운동을 하고, 햇볕을 쬐고, 먹는 것에 겁을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가 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94년 미국에서 폭염으로 죽은 사람이 800여명이라는 숫자는 엄청나게 들려도, 2억 5천만이 넘는 미국인구 가운데 800여명이라는 숫자는 30만 명 중 1명 일 뿐이다.
누가 30만 명 중에서 1명만이 가지고 있는 희한한 심장을 사람들은 이해해 줄 수 있는가!

또 2002년 프랑스에서 폭염으로 죽은 14000여명도, 6000천만명중의 14000명이라면 대략 4300명 중의 1명일뿐이다. 4300명 중의 1명이라는 숫자도 웬만한 아파트단지의 전체인구중의 1명일뿐이다.

더위로 인해서 1000가구 정도의 아파트 단지에서 1명이 죽었다면, 이 죽음은 단단한 일이 못 될 것이다.


나도 온도와 습도가 적당한 실내에서는 I형 당뇨병으로 고생하는 보통의 중증 당뇨병환자들과 비슷하게 생활을 한다.

그러나 햇볕이 강해지고, 기온이 올라가는 4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의 6개월 동안은 앞에 열거한 나만의 특수 상황에 부딪쳐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아니면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바짝 독이 올라서 헉헉거리며 살아야만 한다.

나의 끝없는 반항과. 절규. 그리고 투쟁은 나만이 간직하고 살아가야 할 이러한 삶의 상황 속에서 본능적으로 왔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 추가 된 부분은 2005년 11월에 “...가난한 심장병 환자들을 위한 노래”라는 제목으로 국내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다시 편집한 글이다.

내 개인의 홈페이지 http://www.mryoum.com/main.html 에 실어놓은 1권,2권,3권의 전 내용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삶을 밑바탕으로 인간의 삶 속에서 외면당하는 문제들을 내 나름대로 들추어내서 지적하는 부분들이 많다. 이런 부분을 가지고 얄팍하게 장사하는 목사는 아니니... 내 홈페이지의 방문을 환영한다.


Wednesday, May 24, 2006

느낌이 있는 삶13. - 심장에는 열이 완전히 독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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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13. - 심장에는 열이 완전히 독약....


사람이 심한 열병을 앓다가 회복이 되었어도, 열병을 앓을 때 생긴 열 때문에 심장이 나빠져서 몇 년 뒤에 죽는 예들이 있다.

그만큼 열이 심장에는 치명적으로 나쁘다.

또 죽지는 않더라도 열병을 앓을 때, 몸에 생긴 열에 의해서 생각지도 않게 시력을 잃거나 청력을 잃는 경우들도 종종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밝히는 것은 햇볕이나 더위, 열뿐만이 아니고 스팀과 히터로 난방 하는 실내에도 내 몸이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철 실내의 난방은 스팀과 히터에 의해 난방 하는 곳이 대부분인데, 스팀과 히터로 난방 하는 곳에서 1시간 정도만 있어도 얼굴은 검붉게 변하고, 등뼈와 척추신경이 심하게 아파 오고, 호흡이 가빠오고, 눈은 충혈 되었다가 흰자위 부분이 부어오르고...

특히 히터로 난방 하는 실내에서는 이런 증상들이 더 심해져서 피부까지 따갑다. (난로로 난방 하는 곳에서도 이러한 증상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다만 이런 현상이 조금 덜할 뿐이다.)





25˚ 이하에서는 무릎이나 발이 너무 시려서 양말과 무릎 보호대를 벗을 엄두도 못 내면서도, 몸이 무력감에 빠지고, 호흡이 나빠지는 증상이 몰려와서 온도계를 보면 대충 30˚ 정도이다.

바닥은 알맞게 뜨듯하고, 햇볕이 비치지 않는 25˚∼28˚ 실내, 그것도 간접 난방에 의한 곳만이 내가 ‘유별 떤다.’는 말을 듣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다.


*** 밑의 글은 내 개인의 홈페이지 http://www.mryoum.com/main.html 에 실어놓은 1권, “아직도 살고 싶다“ 중에서 -7.피부단련하기- ‘느낌이 있는 삶13.’과 내용이 필요한 부분을 축출. 편집한 것임.

.... 대부분의 우리나라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휴가와 일광욕’을 가장 무더운 7월 15-8월 15일 사이에만 하는 걸로 인식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몸약하고, 심장 나쁜 사람들은 뜨겁고도 더운 휴가철의 바닷가나 수영장에서 하는 일광욕은 아예 꿈도 꾸지 않는 게 좋다. 몸이 나쁘거나 약한 사람들, 특히 심장이나 신장이 나쁜 사람들한테 뜨거운 열은 ‘열 자체만으로도’ 완전히 독약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서 우리나라에서 일광욕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은 봄·가을의 햇빛과 온도와 습도라는 것도 알아두는 게 좋다.

92년 93년에는 4-5월과, 9-10월 달에 건물 옥상에서 하루 20-30분씩 일광욕을 했었다. 내가 일광욕에 관심을 가진 것은 80년대 초로 비교적 내 투병생활의 처음부터였지만, 내 형편에 따라서 조금씩 하기 시작한 것은 92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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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이후부터는 이렇게 실내에서 봄. 가을에만 하는 일광욕에도 피부가 터지는 현상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정도로 예민하고, 얇아지고, 약해지는 피부를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인생살이가 내가 부딪치고 있는 인생살이이다.

001년에도 가을철에 접어들면서는 방안에서 어느 정도 일광욕을 했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몸과 마음이 탈진하기 직전까지 힘든 상황에서 책까지 쓰기 시작한 2002년부터는 일광욕을 시도조차 못 해보고 있다.



내가 하는 일광욕이란 게 3-4월과 9-10월 달에 관절과 시린 무릎을 위해서 침대 매트리스위에 전기장판을 켜 놓고, 몸에 열 오르면 식힐 선풍기 옆에 갖다 놓고, 몸에 기름 발라 가면서 1∼2시간 동안 하는 일광욕이다.

남들이 보거나 들으면 또 한번 ‘미친놈이 이상한 짓 한다’고 황당하게 취급하겠지만, 오히려 내 쪽에서
“왜? 꼭, 일광욕을 7∼8달의 불볕더위 아래서, 한증막 같이 더운 곳에서만 해야 되는가!”
하고 반문하고 싶다.

다른 당뇨병 환자들도 나처럼 ‘유난 떨고 산다.’는 말을 듣더라도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 시간과 장소만 있으면 방안에서라도, 아니면 아파트 베란다에서라도 햇볕을 쬐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다.

방안에서 하는 일광욕을 하고는 싶어도 자외선이 무서워서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피부에 직접 와 닿는 햇볕이 아니고 유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햇볕에는 자외선이 많이 줄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더구나 방안이나 베란다에서 일광욕을 한다면 방안이 들여다보이는 투명유리 아래서는 안 할 것이다. 뿌연 색의 반투명 유리로 이중창을 하거나 반투명 ‘썬 텐지’라도 붙일 뒤에 옷을 벗을 것이다.

이렇게 이중의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볕에는 자외선의 강도가 반 이상으로 줄여든 상태여서 자외선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이 때도 썬 글라스는 착용하는 게 좋다.




사람의 몸도 생명체이다.

적어도 우리 눈에 쉽게 띄는 생명체, 동물이나 식물에게는 일정량의 햇볕이 필요하다. 온실이나 그늘에서 자란 식물일 수록은 연약하고, 노지에서 충분한 햇볕과 바람을 받고 자란 식물일수록 튼튼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일 것이다.

이 자연의 원리를 사람의 몸에도 작용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은 피부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초기의 당뇨병 환자들이라도 10년 20년 뒤의 피부 관리의 대안 책으로 지금부터라도 햇볕에 자신의 피부를 조금씩 단련시켜 주는 것이 좋다.






느낌이 있는 삶12. -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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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12. -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들....부작용과 특이체질


지금까지도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1977년 가을이후로는 내 몸이 햇볕, 더위, 열, 스팀, 히터, 난로 등에 적응을 못하는 특이체질로 변한 점이다.

요 근래에는 당뇨병의 합병증까지 겹쳐서 모든 빛에도 적응을 못하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 중이다.(컴퓨터 작업이 내 눈에는 중노동중의 중노동?...)


앞에서도 밝혔듯이 I형 당뇨병으로 인해 인슐린주사를 맞은 면서 살아 온 세월이나, 당뇨병이 가져다주는 합병증들로 인해 고생하는 것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 아니다.


나 이외의 남들에게는 뚜렷하게 설명도 못 해 주고 이해도 못시키는, 내 몸만의 특별한 증상들인 햇볕, 더위, 열, 스팀, 히터, 습도,... 특히 햇볕에 대한 부작용이다.



RH-787의 독성으로 비참하게 죽어 가던 몸에 나 혼자만이 견뎌야 하는 78년, 79년의 슬레이트 지붕 밑의 그 지긋지긋한 불볕더위까지 겹쳐서 내 평생을 햇볕, 더위, 열, 스팀, 히터,... 따위의 열이나 더위와 관계가 있는 모든 것에 못 견뎌하는 체질로 변한 것인지, 아니면 RH-787 고유의 독성이 가져다준 부작용인지를 지금도 알 수가 없다.


RH-787 로 음독을 했었던 음독 자 전원이 이러한 증상까지 겹쳐서 힘들게 생고생하다가 죽어 갔는지, 아니면 RH-787 로 음독을 했었던 음독 자들 중에서도 이런 증상들은 나 혼자만이 겪는 증상인지를, 지금까지도 확실히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바람도 별로 통하지 않는 사랑채의 뜨거운 방에서 78년, 79년의 찜통더위를 온 몸으로 고스란히 견뎌 낼 수밖에 없었던 - 나 혼자만이 처했었던 - 상황이 만들어 낸 결과였는지를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다.




느낌이 있는 삶11. - 딱 꼬집어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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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11. ....딱 꼬집어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의 겨울은 추웠다.

슬레이트를 지붕으로 얹은 사랑채는 여름에는 한층 더 더운 열기를 뿜어내는 반면, 겨울에는 몹시 춥다는 특징이 있는 주거공간이다. 유난히 무더웠던 78년의 여름을 죽어가는 몸으로 힘들게 버텨내고,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되자 이번에는 너무 추운 겨울을 맞이해야만 했다.

78년11월~79년2월 사이의 온도가 다른 해에 비해서 추웠다는 말이 아니다. 슬레이트로 사랑채의 지붕을 얹은 덕에 여름철에는 78년 여름의 불볕더위에 달구어진 덕분으로 찜통 여름을 보내야 했고, 겨울에는 외풍이 센 방안에서 추운 겨울을 맞이해야만 했다.

더구나 나 혼자서 누워만 있었던 공간이었다.




78년 여름부터는 주로 큰형수가 하루 3번의 식사와 사랑채의 연탄아궁이를 관리했었는데, 78년 가을부터는 두 번째 조카를 임신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시골의 겨울철답게 이른 시간에 저녁식사와 저녁설거지까지 끝내고 연탄까지 갈아 놓는 시간이 대략 8시 전후의 시간대였다. 저녁 8시 전후에 갈아 논 연탄은 그 다음날 아침9시정도에 다시 갈아 놓게 된다.

슬레이트 지붕특유의 찬바람이 도는 방안공기, 혼자서 누워있어서 더 추운 공간, 저녁 7-8시에서 갈면 다음날 9시에 갈아 넣는 연탄아궁이....그때 몸으로 느끼는 추위는 “...정말 추웠다.”







또 그 시절에는 냄새에도 유난히 민감한 시기였다.

훈풍이 들기 시작하는 4월부터는 딱 꼬집어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공기에 실려와 묘하게 붕 뜨는 듯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기 5월에는 라일락, 6월에는 찔레꽃,... 이 모든 냄새들이 내 몸과 마음을 들뜨게 했었다.

외형상으로는 기어 다니지도 못하고 누운 체로 죽어만 가던 몸이 들떠봤자 그게 그거지만, 그래도 아직은 코로 숨쉬면서 ‘살아 있는 특권’이 있는지라 4.5월의 훈풍 속에 실려 있는 묘한 공기 덕분에 마음속으로부터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46살을 살아오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삶이 아름답다”는 말을 받아들인 적이 몇 번 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첫 번째로 그 말을 실감한 것은 죽어만 가던 그 시절에 코끝에 스물 스물 스며들던 봄내음에서였다.



혼자만 누워만 있었던 방안에 아주 드물게 누군가가 왔다 간 날은 하루 종일 사람냄새에 시달렸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한 날은 ‘질고도 짙은 인간의 냄새’가 하루 종일 방안에 남아 있곤 했었다.

내 가족들조차도 거의 방안에는 들어오지 않고, 방문만 연 상태에서 3끼 식사와 간식거리를 넣어 주었던 시절이어서,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사람의 냄새가 지독하다”는 말도 그때 알았다.


Monday, May 2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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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10. - 1978년 여름의 찜통더위!



78년 여름은 끔찍이도 더웠다.

70년만의 가뭄과 함께 ‘여름이 일찍 찾아 온 해’였고, 더위와 가뭄이 겹쳐서 기록적으로 더운 한 해였다.





70년대 초 시골에서 ‘만년벽돌’이라는-흙에다 횟가루를 섞어서 만든 벽돌로서 옛날의 흙벽돌을 보다는 적음-흙벽돌로 행랑채의 몸채를 짓고 그 위에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만년벽돌’로 벽을 쌓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은 사랑채의 더위는 그야말로 ‘찜통더위’라는 말이 맞다. 같은 여름, 같은 절대온도, 같은 더위, 같은 시골이라도 ‘새마을 운동’의 여파로 행해졌던 초가지붕의 이엉을 적당히 벗겨 내고 기와나 슬레이트를 얹어서 지붕의 모양새만 바꾼 ‘지붕 개량’한 농가의 더위와는 사뭇 다르다.

초가지붕을 개량한 농가의 지붕에는 석 가래와, 흙, 짚들이 두껍게 자리 잡아서 한여름에 내리쬐는 불볕이라도 차단하는 효과가 커지는 통에 한여름에도 그렇게 덥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같은 슬레이트 지붕이라도 만년 벽돌로 몸채를 짓고 그 위에다 목재로 지붕 골재만 한 상태에다 슬레이트를 직접 얹은 행랑채의 여름은 도시의 평면지붕의(슬래브)양옥집에서 느껴야만 하는 더위보다도 훨씬 더 덥다.

이 행랑채 문간방에서 찜통더위를 죽어가던 몸으로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으며 78년, 79년의 여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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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9. -...살아 날 것에 희망을 두지 말라...



70년 만에 찾아왔다던, 그래서 신문과 라디오에서 가뭄과 무더위에 대한 기록을 수 없이 발표하게 만들었던 78년의 여름이 지나가고, 찬바람이 돌고, 9월·10월로 접어들면서 숨쉬고 사는 것만은 견딜 만 했다.

얼굴의 부기도 조금은 빠지고, 입맛도 조금씩 되살아나서 비록 한쪽으로 누워서 먹는 밥이었지만, 몸 상태에 비해서 곧 잘 먹었다.

하지만 몸 상태는 더 나빠져만 갔었다.





누이들이 내 몸이 의심스러워 입원했던 병원을 10월인가 11월인가에 찾아갔었다. 병원에 가서 들은 말이란 것이 고작 “...먹고 싶다는 것 다 해 주라...”는 의사의 말만 들어야 했다.

제대로 표현하면 “...살아 날 것에 희망을 두지 말라...”는,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곧 죽을 것...” 이라는 의사의 판단이 내려진 것이 78년 가을이었다,

이 상황이 RH-787 음독이후 1년 정도 경과한 뒤의 내 몸 상태였다.


“,..곧 죽을 것...” 이라는 말을 최대한 회유적으로 표현한 의사에 말만 들어도 기운이 다 빠지는 판국인데, 4월에 내 몸 꼴을 보았던 나이 어린 간호보조원이 한술 더 떠서“어머 그 학생 아직도 죽지 않았어요? 이상하다, 죽었을 텐데!” 라는 말을 누이들한테 했었다고 한다.

‘곧 죽을 것이다’라는 의사의 판정은 낫지만, 나이 어린 간호보조사가 자기감정이나 말을 조절하지 못하고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누이들은 한층 더 참담해 했었고, 이 말을 누이들한테 전해들은 부모님들은 그 어린 간호보조사한테 애꿎은 욕만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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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8. - 인간의 몸은 ‘사마귀’와 닮은 꼴?...

다시 이야기를 78년으로 돌리겠다.

78년 4월에 잠깐 동안이라도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망가지는 내 몸이 이상해서 누이들이 나를 77년 가을에 입원했었던 병원으로 마지막으로 데리고 갔었다.

그때 잰 몸무게가 40Kg 정도로 기억한다.

내 키는 178cm, 혹은 180cm이다.(지금껏 178cm로 알고 살아왔는데 2003년 겨울의 건강검진 때 179cm로 나왔다. 178cm라고 하는 젊은애들과 키를 재어보면 내가 그들보다 2cm정도는 크다)
그날 누이들은 RH-787 음독 후 6개월 만에 이미 “...희망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어야 했다.




78년 4월 이후에 몸은 더욱 마르고 망가져만 갔다.

78년 여름의 내 몸꼴은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던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앙상하게 마른 몸과, 78년의 찜통 속 같이 더웠던 여름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여름내내 24시간을 선풍기바람에만 매달려 헐떡이며 누워만 있다 보니, 얼굴은 밀납 보다도 더 연한 누런색을 띄고 부어올랐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통과, 그 위에 부어올라서 커다랗게 자리 잡은 얼굴....

인간의 몸꼴이 마르면 마를수록 ‘사마귀’와 같은 몸꼴을 갖게 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이 형상이 ‘78년 여름의 내 자화상’이다.





Thursday, May 1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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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7. - 자위행위 -최고의 건강지킴이?...할 수 있는 만큼? 그리고 덤덤하게!


2달 정도를 망가져가는 몸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손놓고 구경만 하고 있다가,
어떻게 사는 인생인데....
어떻게 견디는 인생인데,,,,!!
을 수 없이 되씹으며 내 특유의 성깔, 오기, 분노, 삶에 대한 투쟁, 의욕, 신앙, 믿음,...등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망가져가는 내 몸을 살리기 위해서 그야말로 별의 별짓(?)을 생각해내고, 실제로 시험을 해 보면서 그 힘든 시기를 어렵게 넘겼다.




2001년의 여름에 내 몸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시도했었던 방법들 중에서 목욕 법의 도움이 가장 컸음을 이 기회에 다른 환자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2001년 여름 한철에만 20년 동안 실천해 보았던 목욕법보다도 더 많은 목욕 법을 실천해봤다. 그 목욕 법들을 실천해 보는 과정에서 진짜 수 없이 ‘헛 좆’을 세우고, 다시 주저앉히고, 다시 세우고,...

77-79년에 내가 내 페니스, 자지를 만질 때는 만지기 좋고, 만져지기 쉬운 장난감으로서의 역할만을 했을 뿐, ‘영원한 장난감’이상은 그 어떤 이상도, 이하의 대상(?)도 아니었다.

하지만 2001년 여름부터 내가 내 페니스를 본격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그리고 헤아릴 수도 없이 노골적으로 만진 것은 진짜 살기 위해서 선택한 최종적인 몸부림이었다.



남자의 몸, 그것도 건강 상태에 따라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한 곳을 만져서 온 몸의 신경계통과 몸의 기능들을 가장 많이 살릴 수 있는 곳은 ‘ 페니스, 남근, 자지, 좆,...을 마사지하고, 헛 좆 세우고, 다시 만지고,...을 할 수 있는 만큼 반복적으로 시도했었다.

죽더라도 가슴속에 불한덩어리를 가둬 놓은 체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는 나 진짜 살고 싶었다.

나도 ‘내 할말 좀 해보고 죽겠다’고 모진 결심을 한 것도 이때였다.




느낌이 있는 삶6. -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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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6. - 황당 그 자체!


밝히기도 힘든 과거의 습관을 다시 한번 되살린 것은 2001년 7월부터이다.

2000년 1월 1일에 옛날의 ‘율전장로교회’가 있었던 자리에 새롭게 세워진 교회에서 만혼의 결혼식을 했지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도 전인 결혼 2달 만에 이혼,

그리고 1999년 10월에 안산사동에 융자를 끼고 구입한 교회 건물 1층에 있는 어린이집을 율전장로교회 시절의 여자후배에게 세를 내주었지만 교회나 어린이집과는 상관없는 황당한 일들만 줄줄이 연이지어서 일어나고,...





그 와중에도 최*철의 삼성카드 채무 빚에 대한 보증을 서주었다가 보증서 준 3달 후부터 보증인으로 곤욕을 치루고, 내 몸 사정상 나 혼자서는 목회를 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신*돈 목사하고 같이 하기로 결의하고 안산에서 병점으로 교회를 옮겨서 새롭게 목회를 시작했지만, 설교한지 2번 만에 설교문제로 신*돈 목사와 트러블이 일어나 격별하기도 합의하고, 안산에 있을 때 보다 더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이때의 설교들은 내 개인의 홈페이지 http://www.mryoum.com/main.html 의 ’Mr.염의책들‘ 중 ‘죽지 않고 살아서’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구원자, 숨어 계신 하나님이시여!’ 에 실려 있는‘최상의 선물’과 ‘옛날을 기억하라’ 임)


내 인생에서 77-79년이 1번째로 힘든 시기라면, 2001년 즈음은 2번째로 힘든 시기이고, 2번째로 온 몸이 망가질 시기였다.



2001년 6월. 신*돈 목사와의 트러블 이후에는 온몸이 붓고, 오줌에서 심한 냄새가 나고, 나중에는 심한‘화병’ 증세까지 생겨나고,...그 상황에서도 최*철의 삼성카드 채무 빚의 보증인으로서 역할을 요구하는 ‘삼성카드 채권 팀’에게 빚 독촉 전화를 받으면서 매달 적지 않은 돈을 최*철 대신 ‘삼성카드 채권 팀’ 앞으로 보증기간 30개월 동안에 26번을 넣어주어야만 했다.

처음2달은 온 몸이 망가져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껏 생각해 낸다는 것이 또 다시 ‘자살’만을 몇 번 생각해 냈을 뿐. 특별한 방법이나 대책 없이 지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