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September 26, 2006

느낌이 있는 삶43. -누울 곳을 찾아 헤매며 보았던 학력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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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43. -너무 씁쓸하기만 했었던 학력고사 보던 날을 회상하면....



내 형제는 5남매이다.

나는 그 중의 막내이다. 다른 형제들은 다른(?)사람들처럼 장가들고, 시집가서 아들·딸 낳으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아들·딸, 즉 조카들 7명 모두가 대학에 진학했다. 조카들도 다른 집과 같이 고 3때는 부모가 신경 써 주고, 특히 시험 보는 날은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할 소리까지도 참아가며 수험생의 예민한 신경 건드리지 않으려고 한다. 자식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을 고사하고 오히려 부모가 더 긴장해서 시험장까지 보호해 간다. 이런 모습은 대한민국에서 1년에 1번씩 행해지는 고입 · 대입 보는 날의 전국적인 풍경이고, 내 형제 집안의 풍경이기도 하다.

내가 학력고사를 본 81년 11월로부터 25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씁쓸하다.

대입 검정고시를 보던 1980년 4월에는 걷는 것마저도 영 서툴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내려오는 게 너무 힘들어서 계단을 내려 올 때는 계단위에서 두발을 함께 모았다가 옮기고, 다시 두발을 모았다가 다시 옮겨야만 하는 식으로 엉거주춤 계단을 내려오던 때였다.

시험장까지도 크고 두꺼운 방석을 가지고 들어가서 시험시간 중간 중간에 누워 쉬면서까지 시험을 치러야만 했고, 학력고사 때도 점심시간에 누울 곳을 찾아서 가 보지도 않은 작은 누이 집을 어림짐작만으로 찾아가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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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시험장 근처의 여관은 생각지도 못 했었고, 설혹 생각까지는 했다 하더라도 그만한 여유 돈도 없었다.




Saturday, September 2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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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42. -학력고사 보는 날



학력고사 보는 날은 아침부터 힘에 부쳤다.

아침 밥상에서 아버님이 “니 나이의 다른 집 자식들은 대학생인데, 뭐 때문에 쥐약은 처먹어 가지고…, 인제 시험을 보면......” 라는 꾸지람 덕분에 하루에 3대 들어오던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눈물을 씻으며 이웃동네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시험장인 수성 중학교에 도착했다.

3교시 끝나고 70분의 점심시간이 되자 몸은 아프고, 배도 고프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해 11월 초에 시집 간 작은 누이 집이 시험장 부근이라는 것과, 걸어서 7∼10분 거리라는 말을 기억하고는, 대충 짐작되는 동네를 찾아갔다. 그것도 어설프게 들은 터라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무턱대고 찾아 나섰다. 대충 들은 대로 비슷한 집을 찾아갔는데, 한번에 누이가 사는 집을 찾았다.

마침 누이는 시댁의 김장 때문에 시댁에 내려갔고, 점심이라야 매형이 끓여주는 라면 한 그릇이 전부였다. 몸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기 위해 라면을 먹은 뒤 방바닥에 20분 정도를 누워 있다가 시험장으로 돌아와 오후 시험을 치렀다.

그날 시험은 신경성으로 설사증세까지 겹쳐서 힘들게 본 학력고사이다.





Friday, September 22, 2006

느낌이 있는 삶41. - 학력고사, 그리고 성대 조경과 82학번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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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41. -벼락치기 공부와 학력고사, 그리고 성대 조경과 82학번 입학!



가장 무더운 8월 초부터 시작한 공부는 11월20일경 학력고사를 치룰 때까지 미쳐 4달이 미쳐 못 되는 짧은 기간동안에 목표량을 이뤄내야만 했다.

이 때도 취약 과목인 영·수는 시험 준비에서 제외시킨 체 암기 과목 위주의 벼락치기 공부였다.

오전9시에 집을 떠나서 오후 7시까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집에 돌아와서는 기껏 1~2시간 정도만 책을 보고, 공부하는 중간 중간에도 사립 독서실 바닥에 누워 쉬어야 했는데도, 결과는 성대 조경과 82학번 입학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수원시 (장안구) 율전동 336번지는 ‘성대 조경과’가 있는 건물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110일 정도에 영·수를 제외한 학력고사 전 과목을 4번 공부할 계획을 세웠다.


가령 1,2,3학년 전 과목을 공부하는데 첫 번째는 50일 걸렸다면 2번째는 25일, 3번째는 15일, 4번째는 10일, 나머지는 10일 정도는 여유분으로 계산하고, 이런 식으로 공부하면서 공부하는 중간 중간에 80,81년 학력고사 문제를 풀어 보니 대충 내가 획득 할 수 있는 점수가 예상되었다.


계획한 바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3번째까지만 할 수 있었다. 생각처럼 몸이 따라 주지 않아서 4번째와 10일 정도의 여유분은 없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세웠던 계획에 내 몸으로 내 눈 사정을 가지고도 그 정도의 결과가 뒤따라 왔으면 성공한 셈인데, 그 때는 나 자신에 대한 욕심 때문에 어느 정도 실망감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예상 점수보다 실제점수가 안 나오면 점수발표 한 달 전부터 마음 고생하기가 싫어서 11월 20일 경 학력고사를 치르고 점수가 발표될 때까지 내 점수를 점검해 보지 않았다. 발표일 날에 가서야 예상했던 점수보다 실제점수가 10%정도가 덜 나온 것을 알았다. “점수가 이것밖에 안 나왔으니 어디를 가야하나”하고 걱정했는데 82학력고사는 80,81년에 비해 전체적으로 20∼30점 정도가 덜 나온 것으로 발표됐다.


나만 예상 점수보다 20∼30점 덜 나온 게 아니고 수험생 모두가 덜 나왔으니, 내가 획득한 점수를 전체 수험생들에게 적용시키면 이득도 밑지는 것도 없었다. 그 해에는 내신점수를 계산 할 때 검정고시 출신의 수험생들은 검정고시 출신 수험생들만 별도로 계산한 덕분에 같은 점수를 가진 일반 고등학교 출신 수험생들보다 내신 점수에서 몇 점 더 유리하게 적용되는 덕분에 성대 조경학과에 입학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책을 만들 때에도 이와 비슷하게 계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2002년 여름 처음 책을 쓰기로 작정했을 때에는 1권만 쓸려고 했었다. 아마 2002년 이후에 내 삶이 쉽게 풀렸으면 1권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2002년 이후에도 ‘이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 의한 상처'는 계속 되고 그로 인해 내 인생이 너무 꼬이다 보니 출간 목표를 내 살아생전에, 내 이야기를, 내입으로 하기위해서 ‘죽․지․않․고․살․아․서’의 시리즈를 10권까지 내겠다고 바꾸어 버렸다.


몸이 더 나빠지고 ,특히 눈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고, 돈 사정까지도 여의치 않아서 그 목표량에 어느 정도까지 해 낼 수 있을지는 미정이다.


하지만 목표량을 이루고 못 이루고를 제쳐 두고서라도 인생이 가장 힘들 때마다 계획을 짜고, 세워 논 계획을 밀고 나가는 ‘나만의 독특한 생활방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Monday, September 18, 2006

느낌이 있는 삶40....‘영원한 민방위’....영원한 인슐린 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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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40. -1981년 5월 이후...‘영원한 민방위’....영원한 인슐린 주사


“...살아서 끝끝내 부모 고생시키고 너도 사람구실 못 할 바에야 지금 죽은 게 나!...”란 야속한 말로 자존심 자체가 달아 날 정도로 자존심을 짓이겨졌더라도, 그래도 자식이고 핏줄이니 외면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부모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혼자서 2주인가, 20일인가 통―원 치료를 받은 후, 그때부터 집에서 인슐린 주사를 스스로 주사하며 오늘까지 버텨오고 있다.


그 해(1981년 5월)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에서 ‘징집면제’로 판정 받아서 ‘영원한 민방위’로 낙찰되었다.


몸도 통원 치료를 처음 시작할 때는 49Kg에 팔, 다리, 손, 발에 근육 경직 현상(쥐나는 증상)이 심했는데, 통원 치료를 시작한 한 달 뒤에는 몸무게도 53, 54Kg으로 늘어났고, 근육 경직 현상도 점차로 그 횟수가 줄었다.


그 해 7월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 준비를 도와주고, 프로그램 1개를 맡아서 책임 지도하고, 3학년을 맡아서 가르치다가 마지막 날 ‘탈진 현상’과 함께 몸이 비틀려서 어쩔 줄 몰라서 목 놓아 울고서, 며칠 뒤부터 대입 학력고사를 치르기 위해 혼자서, 학력고사를 위한 시험 준비를 하기 시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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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September 1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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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39. -‘죽더라도 짐짝 취급 받으면서 죽기는 싫다’는 독기와 아집....



80년 11월부터 다시 시작 된 당뇨병 자각 증상 이후 12월 말 1977년 입원했던 병원에서 당뇨병의 재발을 확인 하고도 ‘당뇨병 재발이래.’ 라는 말까지는 알렸지만, 그 외에는 당뇨병에 대한 어떠한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

21-22살의 나이지만, 이미 화려한 경력을(?) 지닌 터라 다시 특별한 요청을 할 처지가 못 돼서 몇 달을 너무 힘들게 견디다가 끝까지 버텨내지 못하고(?) 피붙이들에게 내 증상이 너무 심하다고 말해 버렸다.

하지만 결론은 냉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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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해서 자살을 시도 한 이후 내 피붙이와, 내 집안에서의 내 처지는 이것 밖에 안됐다.

77년 11월에 내가 RH-787로 음독을 선택했던 이후에 이와 비슷한 문제들로 26년을 집안에서 식구들과 감정 대립을 일으킬 때마다 “누가 너보고 쥐약 쳐 먹으랬냐?”가 아버님 살아생전에는 아버지의 입에서, 지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형제들의 입을 통해서 표면화 됐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눈물대신 어금니를 씹어가면서 가족들 사이에 ‘내 자리 매김’을 하려고 무던히도 발광하면서 살아왔다.

때로는 어머님까지도 이 말을 써 먹곤 한다.


이런 내 삶의 배경 덕분에 내 의료보험증에는 건강한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깨끗하다. 아예 백지에 가까운 것이 내 의료 보험증이다.(이 글의 초고를 작성하던 2002,2003년까지는...)

죽더라도 내 형제에게 까지도 짐짝 취급 받으면서 죽기는 싫다는 내 특유의 독기와 삶에 대한 아집도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해서 형성된 것이다.





Thursday, September 1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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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38. -왜? 왜? 왜?.... 종교적 체험, 신비, 감정....



왜?

죽어 가느냐고 신경밖에 있었던 2년을 제외하고라도, 종교적 이적을 체험 후 1년 3개월 동안은 당뇨병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니까 그때서야 다시 당뇨병 증세가 엄습한 것일까?

1년 3개월 동안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어서 힘드나마 자신을 추스릴 만 하니까 그때서야 3년 전에 발병했던 당뇨병 증상들이 나타나서 급속도로 몸을 악화시키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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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의를 나 자신에게 수없이 제기해 보지만 뾰족한 답이 없다.


다만 ‘종교적 체험 직후에 당뇨병 증세가 급격히 엄습했더라면 회복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는 생각만 할 뿐, 이런 스스로의 물음에 대해서 나 자신을 이해시킬만한 특별한 답은 지금까지도 찾아내지를 못하고 있다.

79년 8월에 경험한 종교적 체험과 80년 11월 이후에 발병 된 당뇨병의 재발과 급작스러운 악화에 대해서는 의사들이 뭐라고 하든, ‘그냥 종교적 체험, 신비, 감정, 이적.... 등의 범위에 묶어 두고 싶다’





Wednesday, September 1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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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37. -걷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종교적 체험이니, 종교적 신비니, 종교적 감정은 79년8월을 제외하고도 내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도 종교에서 언급하는 ‘종교적인 신비’ 나 ‘개인적인 체험’과 연관시켜서 생각하고 싶다.

RH-787 음독 후 췌장의 손상으로 필연적으로 발병된 I형 당뇨병이지만, 이미 죽어 가는 몸 때문에 인슐린 주사는 3달 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미 밝혔다. (34번 참고)

그 후 79년 8월 율전 장로교회에서 종교적 이적을 체험한 후 1년 3개월 동안은 특별한 증상이 없었다. 몸 상태에 비해서는 밥도 잘 먹는 편이었고, 우유 소화력도 좋아서 몇 달 동안은 1000-2000cc의 많은 양의 우유를 매일 먹었다.
시간이 갈수록 자기가 노력하는 만큼 몸도 좋아질 줄 알았고, 또 1년 3개월 동안은 나의 이전 생각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몸이 점차로 그렇게 회복되어 갔다.


몸의 회복에 대해서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고 희망적일 때, 갑자기 3년 전 RH-787 음독과 함께 발병되었던 당뇨병 증세가 무섭게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건강한 사람들에게 서서히 나타나는 자각증세와 진행 속도가 아니었다. 내 몸의 특별한 경력 덕분이지, 당뇨병의 진행 속도가 급속도로 빨랐다.


자각 증상을 느낀 지 불과 1달 만에 몸에 심각한 증상들이 나타났고, 2~3달 이후에는 걷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몸 전체가 악화되어 갔다.


힘들게 만들어가던 몸이 너무 쉽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Saturday, September 09, 2006

느낌이 있는 삶36. - 1980년11월, 당뇨병의 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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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36. - 1980년11월, 당뇨병의 재발(?)


당시 서 정 호 전도사님(보통 목사가 되기까지 전도사‐강도사‐목사의 절차를 밟게 됨)이 개척하던 율전 장로교회의 부흥회 ‐ 내 기억으로는 79년8월13일 저녁∼17일 새벽‐ 에 친구였던 전oo의 도움으로 리어카에 실려 가서 종교적 이적을 체험하고도 9월 하순까지 천막 교회에서 먹고, 자고, 어린이 변기를 사용해서 똥. 오줌 받아내며 지냈었다.


몇 달이 지나서야 재래식 변소 출입은 가능했다.(책의 앞부분과 일부는 중복, 내용상 필요해서 다시 서술했음) 그 때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로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내 나이 또래의 친구들처럼 정상 적으로 살 줄 알았다.


이런 생각은 나뿐만의 생각이 아니고, 내 주위 사람들 모두의 생각이었다.


섣부른 판단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희망이 있었기에 몸이 힘들어하는 것도 참아 가면서 다음 해인 1980년 2월초, 당시 북문 위에 있었던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몸을 가지고 학원을 다녔다는 게 오히려 무모하게 생각되지만, 예상 밖으로 빨리 합격증을 받았다. 그해 11월 중순 무렵에는 몸무게도 52Kg까지 늘어났다. (33번을 참고)

그런데 11월 하순부터는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흔히 당뇨병 증상들을 열거할 때 맨 위에 기록되는 다뇨, 목마름, 무력감... 따위의 증상들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마음과 몸 고생을 혼자서 견뎌보다가 12월 말, 77년에 입원했던 병원에서 피검사, X레이 촬영 등 몇 가지 검사를 받아 보니 당뇨병의 재발(?) 이었다.




Friday, September 08, 2006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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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삶35. - 22개월은 ‘발기 한번 안됐다.’....이런 몸이 내 몸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냥 죽어갔다.

머릿속의 의식은 살아 있었지만 몸 전체의 기능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남자 나이 17∼19살 시절은 여자 생각을 안 해도, 여자를 스치지 앉아도, 질퍽한 장면을 떠 올리지 않아도,...주체 못할 정도로 일어나는 발기 현상 때문에, 아쉬운 데로 적당히 ‘자위행위’로 만족해(?) 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그 나이의 특징이기도 하다.

내 나이 17살 11월6일부터 22개월은 ‘발기 한번 안됐다.

....이런 몸이 당시의 내 몸이었다.





일반적이라면 건강하던 젊은 몸뚱이가 2년 동안 죽어 가더라도 - 암이든지 아니면 암보다 더 한 병이 라도 ―온몸의 기능이나, 신경 조직, 발기력이 이 정도로 망가지면서 까지 죽어가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적어도 뇌와 중추신경, 척추 등을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면, 이 정도까지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R787을 음독 한 후의 내 몸은 이랬었다.



또 한 가지는 귓바퀴 뒤에서부터 턱 끝 부분(후에 이 부분을 ‘외이공’이라고 지칭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과 편도선 주위, 어금니 근처는 28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부기가 있고, 잔뜩 독이 올라 있어서, 무엇을 먹을 때는 아파서 인상을 찡그려야 하고, 이발소에 가서도 그 부분은 만지지도 못하게 한다.


처음 2∼3년 동안은 입안에 음식물이 들어오기만 하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고 나중에는 손으로 아래 턱부터 귓부리까지 움켜줘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면 누운 상태에서 몸을 옆으로 돌려 고개만 이용해서 먹던 밥도, 첫 숟가락 먹은 뒤에는 씹지도·삼키지도 못한 채 고개를 몇 번 흔들고, 입을 벌리고, 턱이나 편도선 부위를 움켜쥐고 .... 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먹어야 했다.


29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은 이런 증상들이 많이 양호해졌지만 지금도 몸이 피곤할 때나 자극성이 있는 것을 먹었을 때, 그리고 처음 먹어 보는 음식물일 때는 처음 1∼2분은 이 부분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때가 많다.


특히 신맛이 강하게 든 음식물일 때는 이 부분의 아픈 증세가 더 심해져서 신맛 나는 과일은 주스로 만들어 먹을 뿐, 씹어서 먹는 것은 곤란한 지경이다.
신맛을 이렇게 싫어하면서 몸의 컨디션을 위해서 신맛이 강한 주스로 자주 먹고 있다, 특히 몸이 부을 때는(‘부종’ 현상이 있을 때면) ‘이뇨 작용’을 돕기 위해서 분말로 된 레몬 홍차 등을 물에 희석해 시큼한 음료수를 만든 뒤에 신맛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식초까지 1-2숟가락 더 넣은 뒤에 귓부리 부분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려가면서까지 먹고 있다.


지면에서 RH―787이라는 고유명사와 그 독성을 너무 많이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 건, 넘치는 정욕에 비틀리는 허리를 가질 17∼19살의 몸뚱이를 철저히 죽어가게 한 지독한 약이 바로 내가 먹은 쥐약이고, 그 독성이 29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내 몸 곳곳에 남아 있어서 죽는 순간까지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고생 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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