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18, 2006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52.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52.

느낌이 있는 삶52. - 내 정체성에 대한 혼돈... 왜? 그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야 했나!’


95년은 양지에서 살 때였다. 2월에 우연하게 산책길에서 양지에 살던 학교 직원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후 내 사정이 딱하다고 장학금을 주선해 주었다. 30만 원짜리 장학금이었다.

그 30만원 중 5만원은 교회에 헌금으로 내고, 내 돈 25만원을 합친 50만원으로 다른 신학생 등록금을 해 주었다.(당시 신 대원 등록금 전액이 100만원이었음) 그때부터 내 생활비와 약값을 줄여가며 매 학기 마다 다른 신학생을 몇 십 만원씩을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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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봄, 그 때에도 30만원으로 다른 학생을 도와주었는데, 생각지 않게 20만원이 들어왔다.

동네 후배면서 신학교에서는 선배인 전도사를 신 대원 입학 할 때와 그 다음 학기에 거쳐 50만원을 도와 준 적이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리고 내가 어려울 때 그에게 3번에 걸쳐서 80만원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3번째가 3학년 늦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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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않은 20만원 가지고 무얼 살까 생각했는데, 며칠 뒤 ‘상담학’ 수업 중 교수가 각자의 기도를 써서 내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학생이 지금까지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 들어준다고 배워 왔지만 등록금을 위해서 몇 달 동안 기도를 해도, 중보 기도를 부탁해도, 아직도 등록금 해결이 안 됐다.”는 한 학생의 기도문을 교수가 읽었다.


신 대원 3학년 때는 수업 조건이 취약해서 한꺼번에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강당에서 수업을 받았었다. 그 학생의 기도문을 수업 중에 교수가 읽었기에 기도문의 내용을 150명이나 200명의 학생이 들었다. 들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나 역시 모르는 척 하면 된다.

그 학생이 민망한지 수업도중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나도 따라 나가서 몇 마디 나누고 그 20만원을 그 다음날에 건네주었다. 3년 동안 얼굴 몇 번 마주친 적 밖에 없고 말 한마디 안 해 본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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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양지에서 살고 그 학생은 용인에 살아서, 그 후 한번 수업이 끝난 뒤에 그 학생의 차로 나를 태워 다 줄 기회가 있어서 ―내가 사는 방에서― 차 한 잔 마신 적이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전도사님이 이렇게 살줄은 몰랐습니다. 난 결혼도 했고, 비록 반 지하라지만 화장실도 수세식이고, 방 2개짜리 전셋집에, 싱크대 있는 부엌, 또 부인이 선교 원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사님이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20만원을 주어서 굉장히 잘 사는 전도사님 인 줄 알았는데요.”
라는 말에


“기도한다고 돈이나 다이아몬드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예는 극히 드물어. 기도의 대부분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져!
왜? 사람들은 기적을 말할 때 초자연적인 것만 말해야 하나? 하나님의 뜻을 베푸는 데는 사람의 손길이 통할 때가 많아, 이것도 기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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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용의 말 몇 마디가 그 전도사와 나 사이에 오고 갔었다. 그 후, 친구가 목사안수 받는데 갔다가 우연히 그 전도사를 만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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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 동안 엄청난 어려움 속에 있다고 했다. 이 어려움은 나의 이런 생각과 행동들이 원인이 되서 일어난 어려움들이다.


지금은 ‘그때 왜? 그렇게 까지 하면서 살아야 했나!’에 의문을 갖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과거를 회상할수록 현재의 삶을 지탱해 줄 내 정체성에 대해서 혼돈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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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December 13, 2006

느낌이 있는 삶51. - 발가락에 콘돔을 씌운 후에....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51.

느낌이 있는 삶51. - 발가락에 콘돔을 씌운 후에....다 지나간 시절의 일이지만....


명색이 목사이면서도 다른 종교인들이 자주 내뱉는 ‘사랑’, ‘자비’, ‘헌신’, ‘영적’,... 따위의 종교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말들을 되도록 절제하면서 살아 왔고, 지금도 이런 단어들은 극도로 제한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지금껏 신앙생활 하는 데 있어서의 기본원칙. 그리고 행동으로 옮겼던 몇 가지를 적어서 내 생활 습관과 생각의 밑바탕을 들춰 보이고 싶다.

91년부터 95년까지 발 때문에 무던히 고생했었다.

당뇨병 그것도 인슐린 주사를 맞는 I형 당뇨병에서는 빠르면 5년, 늦어도 10년이면 합병증들이 서서히 몸에 나타난다는 것은 상식에 가까운 것이다. 내 경우에는 처음으로 나타 증상들은 발톱 빠지는 증세와, 피부의 건조화, 그리고 잇몸 변형이었다. 10년이 지난 86년부터 이러한 증상들이 조금씩 나타났다. 15년 정도인 91년경부터 95년까지는 합병증의 여러 가지 증상들이 발과 심장에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물집이 생기고, 터지고, 고름이 끼고, 발톱이 빠지고,...내 딴에는 열심히 치료한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더 심해져서 발가락이나 뒤꿈치에 적은 구멍이 날 정도로 발의 상처들이 아물지를 않았다.
발이 이렇게 망가지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산책만 하는데도 오는 증상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면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산책인데도 인슐린 주사를 맞은 지 10년 정도가 되자 나에게는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두꺼운 양말을 겹쳐 신어도, 자기 발에 맞는 신발을 골라 신어도, 아침저녁으로 1시간씩 산책만 해도 물집 잡히고, 잘 때는 가끔가다 바늘로 쑤셔 놓은 듯 따갑게 아프고, 뒤꿈치나 발가락에 물집 잡히고, 발톱 빠지고, 잘못하면 고름 끼고.... 발에 생긴 이런 증상들이 89년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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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지방 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93년 신 대원에 입학하자마자 휴학을 하고 94년 봄에 복학을 했다. 91년 봄에 부모․형제의 울타리를 떠나고자 창문하나 없는 희한한 구조의 오피스텔 방 하나를 전세 보증금 1000만에 얻어서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올 때에 300만원이 통장에 있었다.


91, 92, 93, 94 가을까지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약값은 통장에 있었던 300만원과 보증금1000만원 중에서 일부와 조카를 맡아서 공부 가르쳐주고 받는 수고비와 남의 머리를 가끔 해 주고 (87년부터 2~3년간은 미용에 관심을 가지고 미용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90년까지는 간간이 남이 머리를 만져주고 수고비를 받았음) 받은 수고비를 보태서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약값 모두를 해결했다.


94년 10월에는 보증금이 600만원 남았었다. 총 1300만원 중에서 600만원이 남았으니 3년 반 동안 알뜰하게 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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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10월 학교 문제로 양지로 이사 가서 96년 9월까지 살았다. 94년 10월 양지에 이사 간 뒤부터 학비와 생활비를 주기 시작했지만, 주거 환경은 방 한 칸에 쥐들이 수없이 들락거리는 부엌과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방을 800만원 전세에 살았다.


가전제품이라고는 TV, 세탁기, 오디오 없었고 전기밥솥과 중고 냉장고가 전부였다.


빨래는 보통 밟아서 할 때가 많았는데, 몸이 아프거나 힘들 때는 가루비누를 듬뿍 풀은 물에 빨래를 며칠씩 담가 놓곤 했었다. 빨래를 밟을 때 발의 상처에 비눗물이나 오물이 들어가지 말라고 비닐 백을 다리에 묶거나, 심지어 발가락에는 콘돔을 씌운 후에 고무줄로 위를 조인 다음에 빨래를 밟았었다.


내 몸은 찬물에 못 견뎌서. 여름에도 보일러로 물을 데워서 물 온도를 따뜻하게 조절한 다음에야 빨래를 밟아야 했는데, 덥고 힘들어서 헉헉대다 보면 나중에는 사람도, 빨래도 구분 할 것 없이 아예 벌거벗은 체 수 없이 물을 뒤집어쓰면서 빨래를 밟았다.


나 자신은 이렇게 생활하면서도 자신에게 필요한 세탁기와 그 밖의 가전제품들은 안 사고 그 돈으로 다른 신학생을 도와주었다.


또 91년부터 98년까지 틈틈이 조카들과 다른 아이 1,2명의 공부를 돌봐주고는 수고비를 받았는데 이 수고비의 반 이상이 남들을 도와주는데 사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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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December 05, 2006

느낌이 있는 삶50. - ‘한 마리 새처럼’...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50.

느낌이 있는 삶50. - ‘한 마리 새처럼’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



시간이 갈수록 자기들만 살자고 내 몸뚱이는 망가지건 말건, 내 인생은 꼬이건 말건 내 앞에서만 당당한 사람들과 접촉하다 보니....가슴 한 복판에 홧병까지 자리를 잡아서 누굴 만나는 것 자체가 겁이 나 자꾸만 움 추려 들 때가 있다.

분노와 화가 폭발할 때는 우울한 느낌의 팝이나 김영임의 ‘회심곡’ 장사익의 ‘하늘 가는 길’, ‘허 허 바다’ 등을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맥주 1병 정도나 포도주나 매실주 반 병 정도를 마시면서 기분이 안정 될 때까지 들을 때도 많고, 술까지 한잔 먹은 뒤의 감정 까지 토해 내기 위해서 느린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출 때도 종종 있다.

나에게는 이 방법이 스트레스 해소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

나 혼자 사는, 나만의 공간에서 ‘한 마리 새처럼’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 춤을 출 때는 될 수 있는 한 옷을 입지 않고 춘다!!

어차피 살아나기 위해서라면 별 짓(?) 다해가면서 견뎌내고 있는 중인데...술 한 잔 마신 뒤에 옷 벗고 춤을 추는 동작들조차도 나에겐 별 짓(?)에 속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