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ly 16, 2007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58.


.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58.
느낌이 있는 삶 58. - 햇볕, 더위, 열, 스팀, 히터....지겨운 인생살이
.
58
.
85년 겨울에 무던히도 부모, 자식간에 신경전을 벌이다가 내가 수그러졌다. 당시 율전동은 비육우 모범단지로 지정된 시골마을로서 집집마다 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우리 집도 작은 형이 8 ~ 10마리의 소(한우)를 키었다.
,
아버지와 몇 달간을 부딪치다가 1,2년 동안 집안일을 도와주면서 지내다 보면 몸도 조금씩 나아지겠지 하는 결심으로 삭발까지 하고 1,2월 달에는 ‘내 몸이 해 낼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움직였다.
,
불과 1-2달 의 짧은 기간이지만 그 기간 중에 밥도 잘 먹고, 몸무게도 늘어나서, 내 결심이‘헛짓’(?)이 아니다‘ 라면서 지냈는데, 겨울이 지나 가고 3월이 되면서부터는 햇볕이 드는 날에는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고, 무력감에 빠지기 시작하자 내 허탈감도 그에 비례해서 켜져만 가야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

.

다시 몇 달을 방황하다가 86년에는 5월말부터 84년 여름방학 때에 더위를 피해서 갔었던 태백의 절로 갔지만, 절에서 조차도 쫓겨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너무 병자같이 보인다.’가 쫓겨난 이유였다.
.
그것도 공짜로 지내는 절은 아니었는데도 대중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대중은 4명, 그중에서도 1명의 입김덕분에- 대중을 위한다는 종교기관에서, 대중을 위해서, 병든 대중이 쫓겨나야만 했다. 86년에는 절에서 1주일 만에 쫓겨 내려와서 교회에서 3달을 보냈었다.
.
87년 봄에는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내 특기(?)를 발휘해 집안 식구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서 실내포장 마차를 한다고 깝죽거렸다. 실내 포장마차는 7개월 정도 해 봤는데, 열심히 한 것은 3.4월 달 밖에 없다.
.
나에게 햇볕, 더위, 열, 스팀, 히터.... 삶의 전부분이 연결되어있고, 얽매이고, 지배당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부분을 떠나서 내가 부딪친 끔찍하고도 지겨운 인생살이를 설명할 수가 없기에,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는 부분이다.
.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57.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57.
느낌이 있는 삶57. - 부모자식간의 단절된 관계
.
.
57
.
85년 이후부터 줄 곧 집안 식구들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77년 가을 이후의 내 몸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내 말에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덕에 내 피붙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 29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갔지만, 내 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
어쨌든 내 아버님은 보통의 부모, 그것도 한평생을 농사를 짓던 분이었다.
평범한 집안의 평범한 아버지와 ‘특이할 만큼 특별한 몸’을 가지고 사는 부모자식간에 감정의 교류나 이해는 거의 불가능했다.
.
내가 다른 집 자식이었다고 하더라도 내 몸을 이해해주고, 내 몸에 맞춰서 앞날을 이끌어 줄 부모님은 흔치 않았을 것이다.
.
다만 그것이 내 아버지와 부딪쳤을 뿐이지, 다른 집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의 역할을 맡았어도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관계보다는 오히려 더 나쁜 환경, 더 나쁜 관계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56.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56.
느낌이 있는 삶56. - ‘단말마적인 허우적거림’으로 ‘지랄 발광을 떨 때’
56
85년도 대학 4학년이 되면서부터는 내일, 즉 ‘미래’라는 것이 나에게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형상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이 땅에 살면서 4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는 끔찍한 햇빛과 더위를 피하면서 살 재주가 없는 한, 내년이라는 미래는 오늘과 똑같을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내 자신이 비참해지고 초라해지는 이방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자존심 상해서 그야말로 ‘지랄 발광 할 떨 때’ 이기도 하다.

이미 84년 3학년, 85년 4학년, 여름 방학 때는 더위를 피해 강원도 태백의 절로 갔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버님과 본격적으로 부딪치기 시작한 것도 이때 85년 겨울부터다.
아버지는 시골 노인 분답게 대학까지 보냈으니 취직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순서를 기대하셨다. 취직하기 싫으면 대학원에 보내 줄 테니 ‘대학원 시험을 보라’는 것이 나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내가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아니 I형 당뇨병으로 인슐린 주사만 맞고도 살 수 있는 당뇨병 환자라면, 아버님의 기대치를 순응시키기 위해서 한 번쯤은 아버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대학 시절을 편하게 지낸 덕분에 머리 속에 바람만 불고, 자갈 구르는 소리만 들리는 돌대가리도 졸업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모질게 마음먹고 1,2 공부하면 취직시험이나 대학원 시험에 응시는 해봤을 것이고, 그것도 아니었다면 장사나 막일 등을 닥치는 대로 해 본다고 설쳐 댔겠지만, 4월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몸을 가지고는 이 모든 게 무의미 했었다.

또 해 낸다고 하더라도 ‘내일’과 연결이 안 되는 ‘단말마적인 허우적거림’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