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May 08, 2006

느낌이 있는 삶3, - ‘투쟁’ 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삶의 연속




Out of 46-Year-Old Image - Life of Impression3.

느낌이 있는 삶3. - ‘투쟁’ 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삶의 연속


KBS TV프로그램 “사랑의 리퀘스트”에 소개 된 사람들 중에서 ‘루게릭 병’ 이나 ‘근이양종’ 환자를 몇 번 보도 해 준 적이 있다.

내 증상이, 정확히 말하자면 죽어가던 내 몸의 외양이 이와 비슷했다.

음독 후 몇 달 뒤부터는 온 몸이 너무 말라서 근육의 형태들이 없어진 대신에 온몸이 절이고, 아파서 자신의 손이 닿는 부분을 몸의 자세를 바꾸어 가며 쉬지 않고 주물러야 했다.
잠 잘 때도 30분∼1시간 정도에 한번씩은 자세를 ‘바꿀 수 있는 만 큼’ 바꾸면서 잠을 자야만 했는데, 이런 흔적들은 28년이 지난 지금도 어느 정도는 남아 있다.

근육이라곤 찾아 볼 수 없게 마른 몸인지라 바닥에 닿는 부분들이 너무 아파서 방바닥에 솜이불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솜이불을 반으로 접어서 깔고, 밍크 담요를 몸의 굴곡에 맞게끔(마른 몸에 맞게) 여기 저기 뭉텅 거려 대고 누워있어야만 했다.

허리부분에 조금의 압박이라도 모이지 않고 분산되는 자세를 하기위해서 허리 부분이 가장 높고 발과 어깨와 머리가 가장 낮게 해서 2년 동안을 누워만 있어야 했다.

누워만 있는 몸이 저리고, 아파서, 깨어 있는 동안에는 손이 닿는 부위는 쉬지 않고 주무르고, 수 없이 자세를 바꿔준 덕에 다행히도 ‘욕창’은 생기지 않았다.






얇은 베개를 사용해서 머리를 높여서 잠자기 시작한 것은 79년 8월에 ‘율전장로교회’에서 행해졌었던 부흥회에서 ‘종교적 이적을 경험’(?)을 한 이후에도 5년 정도가 지난 뒤에나 가능했다.
- 이 부분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2006년 현재에도 인간사의 모든 일들을 ‘과학’이라고 일컬어지는 문명의 ‘메카니즘’만으로 판단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반면에, 또 개개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모든 ‘종교적 감정’과 ‘종교적 경험’들을 모든 이들에게 객관화 시킬 수만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오늘까지 살아있으면서 이런 글들까지 쓸 수 있는 내 인생배경에는, 79년 8월에 ‘율전장로교회’의 부흥회에서 경험한 종교적 이적(?)을 빼고서는 말이 안 되는 부분들이 있게 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서 정 호 목사님이(당시에는 전도사) 천막교회로 개척하던 ‘율전장로교회’에서 행해졌던 부흥회에 고향친구였던 전학렬의 도움으로 리어카에 실려 가서 79년 8월에 종교적 이적으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후에도 똥·오줌은 몇 달을 어린이 변기를 이용해서 더 받아내야만 했다.

2년 동안을 죽어 가던 몸에 종교적 이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 다음날부터 재래식 변소에서 똥·오줌을 가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종교적 이적’을 운운하며 남들에게는 이해시킬 수 없는 방법으로 살아났지만은, 77년 11월 6일 새벽의 RH-787 음독이후 지금까지의 내 삶은 ‘고통과 인내’라는 말보다는 ‘투쟁’ 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삶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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